No,125 :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5)

2004/2/18(수) 12:33 (MSIE6.0,Windows98) 220.75.188.178 1024x768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5)

"왕실에 관한 일인데 어찌 소인이 함부로 입을 열 수있겠습니까? 다만 의원대장께서는 주인님께 가비공주님에 대한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었겠지요. 그리고 의원대장님께서는 공주님께 가비라는 존함을 쓰시지 안았습니다."
구집사는 호족장의 눈길을 피하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지만 표정은 사뭇 어두웠다.
"의원대장이 나에게 가비공주에 대한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었다!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을까? 그리고 둘째공주님께 가비라는 존함을 쓰지 않은 것이 왜 이상한 것인가?"
호족장은 답답하다는 듯이 구집사에게 질문했다.
"소인, 오늘까지 끝내야 할 집안일이 많아 나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말을 않고 나가는 구집사를 호족장은 붙잡을 수가 없었다. 평소 구집사는 신중하고 충직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주인의 질문에 답도 않고 나가버리는 것이 수하로서 할 행동이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구족장 신분으로 왕실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있겠는가? 호족장은 잠을 이루기 전까지 의원대장의 말과 표정을 더듬어 보았다. 그렇다! 오늘의 의원대장은 평소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수련에 대한 일도 못 마땅해 했고 가비공주에 대해서도 무언가 숨기는 점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는 왜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일까? 평소의 의원대장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이 달아날지라도 나를 부여잡고 설득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명제관의 화장도 의원대장 설득으로 추진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원대장이 무엇이 무서워 한낫 가비공주에 대한 것을 숨긴단 말인가? 호족장은 의원대장이 침묵하는 무언가가 그리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중요사안이 아니기에 의원대장이 자신에게 상의하지 않고있다고 생각했다. 때가 되면 의원대장이 자진해서 털어놓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호족장 혼자서 생각하고 단언하기엔 심각한 사안이 아닌가? 비록 둘째공주의 일이지만 호족장이 충성하는 호우왕의 여식의 문제인 것을!
의원대장은 호족장이 가비공주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정으로 호족장은 수련과 아이가 죽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수련의 아이가 호우왕의 둘째 딸인 가비공주로 둔갑된 것을 누군들 상상이나 할 수있겠는가? 하긴 가비공주가 수련의 아이임을 호족장이 안다해도 어찌하겠는가? 이미 수련의 아이를 둘째공주로 받아들인 호우왕에게 호족장인들 무엇을 간청해 본단 말인가? 가비공주를 죽이라고 설득할 것인가? 아마 호족장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하긴 의원대장 자신도 호우왕의 명에 따라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호우왕과 왕비의 핏줄이 아닌 가비공주의 일을 그냥 묻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제관을 유혹하여 자살에 이르게한 요염한 여인의 피를 받은 아이는 언젠가 어미를 닮아 풍요가야에 큰 피해를 입힐 것이다! 요망한 아이를 살려두는 것도 살이 떨리는 것이거늘 하물며 왕실에서 공주로 키워지고 있다니! 절대 있을 수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가비공주에 대한 출생의 비밀을 모든 백성들이 알아야 한다. 그런 결심이 들자 의원대장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의원대장은 붓을 들고 가비공주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왕비님을 키워 준 유모의 딸이 수련이다. 수련은 왕비님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수련은 대왕비님으로부터 나라를 망칠 요망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궐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대왕비님께서 돌아가시자 수련은 왕비님의 부름을 받고 궐에 들어왔다. 궐에 들어 온 수련은 어린 시절부터 사모하였던 명제관님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있었다. 수련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명제관님을 유혹하였다. 기도와 엄격한 생활로 일관하시던 명제관님은 요사한 수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라의 제사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수련의 육체에 무너지셨다. 명제관님은 자신의 죄를 한탄했고 드디어는 약을 먹고 자살하셨다. 죽기 전, 명제관님은 자신의 모든 죄를 나에게 고백하셨다. 그리고 풍요가야에 악운을 몰고 올 수련과 수련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를 처리해 주길 일임하셨다. 명제관님은 가능한 두 생명이 산 속에서 참회의 생을 마감하길 바라셨지만 풍요가야의 미래가 걸릴 경우 그들의 목숨을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명제관님과 수련의 부정한 관계와 풍요가야의 미래를 숙고한 끝에 가혹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풍요가야의 존속을 위해 잔혹한 짓이지만 두 생명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명제관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심성이 여리고 수련을 의지하는 왕비님 때문이었다. 왕비님께서는 둘째공주를 낳으셨지만 치유될 수없는 병을 안고 태어나셨다. 나는 한달이 넘도록 정유모의 요청에 따라 둘째공주님의 약을 지었다. 약은 갓 태어난 아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강력한 독으로 처방되었다. 혹여 둘째공주님께서 나의 약을 먹고 살아난다 해도 후유증으로 신체의 일부분이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한 약을 드신 둘째공주님은 너무도 건강하셨다. 나, 의원대장은 호우왕님과 왕비님의 둘째공주가 그 분들의 친딸이 아님을 밝히노라! 왕비님이 낳으신 둘째공주님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궐에서 둘째공주로 자라는 아이는 왕비님과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수련의 여식이다. 수련의 아이를 둘째공주로 둔갑시킨 것은 정유모의 치밀한 계획과 왕비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풍요가야의 둘째공주로 자라고 있는 수련의 핏줄은 가비공주이다. 이 엄청난 사실을 풍요가야 의원대장 김씨가 목숨을 걸고 기록해 둔다."
의원대장은 가비공주에 대한 기록을 구겨진 봉투에 넣었다. 의원대장이 목숨을 걸고 기록한 글을 구겨진 봉투에 넣은 것은 외부적으로 하찮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의원대장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큰가야에서 의원직을 맡고 있는 아들 김효가 찾아왔다. 김효는 아직은 젊기에 높은 직책은 아니였지만 번개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후일 김효의원은 번개왕의 지시에 의해 조용왕자와 셋째왕자의 병을 전담하게 된다. 그러나 김효의원에게 쏠리는 번개왕의 신임은 큰가야 출신의원들에게 반감을 사는 계기가 된다.
"이 서찰은 돌아가신 명제관님의 유언을 적은 것이다. 이 서찰은 풍요가야의 명운이 달려 있으니 너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내가 명제관님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죄값으로 어쩌면 풍요가야의 문화와 역사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서찰만으로 그 모든 것을 만회할 수있다. 나는 지금까지 터득한 모든 역술과 기를 이 서찰에 담았다. 이 서찰의 내용은 천년이 흘러도 허공에 떠돌아 후세의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명심해라. 우리 집안의 의술이나 재산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서찰이다. 너는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기는 위급한 시점에 이 서찰을 읽어보거라. 그리고 그 내용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의원대장의 어조는 조용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김효는 간담이 서늘했다.
"아버님! 그토록 중요한 내용이라면 왜 지금 밝히시지 않습니까? 굳이 집안의 대가 끊기는 시점에서야 서찰을 공개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도 그러고 싶구나. 그러나 지금 서찰내용을 공개하면 나는 물론이고 너까지 살아 남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가족의 목숨이 아니라 백성들이 왕실을 욕하며 호우왕님께까지 등을 돌리는 것이다. 만일 호우왕님께서 백성들의 지지를 잃게 되면 족장들은 서로가 추천하는 새로운 왕을 등극시키려 편을 갈라 싸울 것이다. 그리 되면 군사력이 약한 풍요가야는 주위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을 것이다. 명심하거라. 절대 미리 이 서찰을 읽지 말거라. 우리 집안이 위급할 때 보아야한다!"
아버지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지키는 김효의원은 의원대장에게 맹세했다.

가비공주는 왕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호우왕은 철저하게 가비공주를 외면하며 지냈다. 주변에서는 호우왕의 그런 태도를 가비공주가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도 호우왕은 죽은 가비공주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했다. 풍요가야의 둘째공주로 태어났건만 축복은 고사하고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떠난 가여운 가비공주를 잊지 못했다. 호우왕은 왕비의 품에 안겨 있는 수련의 딸을 보면 화가 치밀어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죽은 둘째공주를 위해 눈물이 마르지 않아야할 왕비에게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죽은 둘째공주를 위해 안타까워해야 할 백성들은 수련의 딸을 보며 탄성을 자아냈다. 궐과 백성들 할 것없이 어디에서도 죽은 가비공주의 흔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죽은 가비공주가 받아야 할 모든 귀여움을 영악한 수련의 딸이 빼앗아 가고있었다. 호우왕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비공주가 되어있는 수련의 딸을 철저히 외면하며 미워했다. 그런 호우왕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이는 오직 의원대장이었다. 그러나 호우왕도 의원대장도 죽은 둘째공주에 대해선 한 마디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원대장은 가비공주에 대한 진실을 마음에만 담아 둔 채 세상을 떠났다.
의원대장의 죽음을 가장 기뻐한 것은 정유모였다. 정유모는 가비공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의원대장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물론 호우왕이 침묵하고 있는 가비공주 문제를 의원대장이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유모였지만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더욱이 웃음을 잃은 의원대장은 비밀을 간직한 노인네답게 여간 깐깐하게 구는 것이 아니였다. 자비공주나 가비공주의 진맥을 위해 마주칠 때에도 의원대장은 정유모에게는 말 붙이기를 꺼리며 의식적으로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마음이 철벽인 정유모도 그런 의원대장을 대면할 때면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준 것인지 의원대장이 쉽게 죽어주었다. 호우왕은 호족장에게 명하여 의원대장의 장례를 후히 치르라 명했다.
자비공주는 자라면서 호우왕과 왕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런 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가비공주도 어리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특히 어머니를 염려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가비공주는 어머니 뿐 아니라 정유모에게도 각별한 정을 주었다. 가비공주는 명제관의 명석함과 수련의 싹싹함을 닮아 어린 나이에도 총명함을 보였다. 그렇게 풍요가야의 궐은 겉으로 보기에는 더 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럴 즈음 왕비는 아들을 낳으려고 셋째를 가지기로 결심했다. 왕비는 다음 왕위를 자비공주에게 물려 주려는 호우왕의 심중은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낳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둘째공주를 잃은 호우왕의 슬픔도 누그러질 것 같았고 그러다 보면 가비공주를 대하는 호우왕의 태도도 달라지리라 생각했다.
왕비는 소원하던 데로 셋째 아이를 가졌다. 정유모는 왕비의 임신기간동안 내노라 하는 아들 낳는 비법을 동원하였다. 10달 동안 갖가지 비방을 동원한 정유모의 노력에도 왕비는 세 번째에도 공주를 낳았다. 호우왕은 셋째도 또 공주가 태어난 것이 서운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병약하게 태어난 둘째공주를 생각하면 건강하게 태어난 셋째는 딸이라도 다행이었다. 호우왕은 셋째공주를 기쁘게 여기며 눈에 띄게 챙겨 주었다. 그러나 왕비는 셋째가 아들이 아니라는 것에 무척이나 실망하며 젖도 물리지 않으며 상심해 했다. 그러다 셋째공주가 병이 나자 왕비는 병약하게 떠난 둘째공주를 떠올리며 자신을 반성했다. 왕비는 산후조리도 끝나지 않은 몸으로 셋째공주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몸도 돌보지 않고 셋째공주의 병간호에 매달리는 왕비를 정유모가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유모가 보기에 왕비는 둘째공주에게 못했던 병간호까지 셋째공주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가비공주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동생이 미웠지만 빨리 완쾌되기를 빌었다. 드디어 셋째공주는 왕비의 지극한 간호로 병이 나았다. 왕비는 셋째공주의 회복에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지쳐 쓰러졌다. 결국 왕비는 산후조리의 후유증과 과로로 병을 얻었다.
"호우왕비, 어찌하여 몸이 이렇게 많이 상했습니까? 도대체 약을 들고 있단 말입니까?"
호우왕비의 몸이 많이 아프다는 정유모의 전언을 받은 큰가야의 매화왕비가 급히 달려왔다.
"조용왕자의 일로 힘들 텐데 매화왕비께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나의 근심까지 더하게 되었습니다."
초최한 웃음을 띄며 호우왕비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더 일찍 찾지 못한 제가 무심하지요."
매화왕비가 호우왕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매화왕비와 나는 친 동기처럼 의지하고 지냈지요. 그래서 부탁인데 매화왕비께서 가비공주를 양녀로 삼아 주었으면 합니다. 자비공주는 호우왕님의 총애뿐 아니라 모든 족장들과 백성들에게까지 충성을 받고 있으니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셋째인 들꽃공주도 호우왕님의 귀여움을 받고 호족장까지 관심을 가져주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가비공주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호우왕님께서 눈에 띄게 가비공주를 미워하시니 족장들까지 가비공주를 멀리하고 있지요. 앞으로 내가 죽으면 가비공주의 안위가 걱정입니다. 부디 매화왕비께서 가비공주를 양녀로 삼으시어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세요."
호우왕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호우왕비께서는 죽는다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십니까? 마음을 굳게 가지고 회복해야지요. 호우왕님께서 가비공주를 귀여워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바라신 호우왕님께서 둘째가 공주라는 것에 서운하셔서 그렇겠지요. 그리고 저는 이미 가비공주를 나의 딸로 여기고 있음을 호우왕비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가비공주 또한 나에게 작은 어머님이라 부르며 각별한 정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호우왕비님께서는 가비공주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빨리 병을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매화왕비는 호우왕비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가비공주를 사랑하는 매화왕비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 그리고 후일 가비공주가 영특하게 자라 자격이 된다면 폭풍왕자의 배필로도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만일 가비공주가 폭풍왕자의 배필이 된다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짧을 거란 호우왕비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호우왕비는 매화왕비에게 가비공주를 보살펴 주길 부탁한 몇달 후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병석에 누운 지 일 년을 넘기고 서였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왕비가 죽자 호우왕은 정유모의 많은 권한을 제한시켰다. 시중드는 궁녀를 줄였고 거처를 궐의 외진 곳으로 옮겨 버렸으며 족장들과의 만남도 제한시켰다. 다만 정유모의 딸인 시녀대장은 예전에 누리던 모든 특권을 그대로 유지토록 해주었다. 어린 가비공주에겐 어머니의 죽음만으로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장 아꼈던 정유모를 구박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가비공주는 아버지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느껴졌다. 정유모는 호우왕의 홀대에도 아랑곳 않고 가비공주를 성심껏 보살피며 교육에 힘을 쏟았다. 가비공주는 정유모가 시키는 다양한 교육들이 감당하기 벅찬 과정임에도 열심히 따라 주었다. 여느 때는 가비공주의 지독한 학구열에 정유모도 놀라곤 했다. 웃음이 사라지고 점점 차갑게 변해가는 가비공주는 오직 학문과 자신의 외모 가꾸기에 온 힘을 쏟았다. 마치 나라의 안살림을 챙기는 왕비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으려는 듯 가비공주는 이를 악물고 학문을 닦고 재주를 키웠다. 정유모는 호우왕의 감시에도 왕비와 가까웠던 족장들을 만나며 가비공주의 세를 규합해갔다.
"가비공주님! 꼭 학문을 익히고 능력을 키워 풍요가야에서 제일 영특한 여인이 되십시오. 자비공주님은 절대적으로 호우왕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족장들의 성화에 호우왕님께서 새 왕비를 맞이해도 자비공주님은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왕비님 자리를 다른 여인에게 주면 아니 됩니다. 가비공주님께서 능력을 키워 어머님을 대신하는 풍요가야의 왕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서찰에 왕비님을 지지하던 족장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궐에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또한 어려울 땐 성제관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제관님은 돌아가신 왕비님과 각별했기에 언제나 가비공주님을 지지해줄 것입니다. 풍요가야 백성들에게서 절대 왕비님의 존재가 잊혀지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가비공주님께서만 하실 수있습니다."
정유모가 죽으며 가비공주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권력에 대한 가비공주의 집착은 정유모의 죽음으로부터 확고해졌는지도 몰랐다. 호우왕이 새 왕비를 맞이하지 않는 것은 죽은 왕비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자비공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기도 했다. 호우왕은 자비공주를 후계자로 키우려는 자신의 뜻이 새 왕비로 인해 무산될 수있음을 우려했다. 새 왕비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며 자비공주에게 위협이 될수있었다. 호우왕은 그것이 두려웠다. 새 왕비에 대한 호우왕의 심중을 정유모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녀는 가비공주에게 왕비역할의 짐을 지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정유모가 유언으로까지 강조했던 왕비역활은 가비공주에게 권력에 대해 강한 집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왕비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가비공주의 노력은 호우왕의 격한 노여움을 사게 된다. 호우왕의 노여움은 가비공주에게 심한 외로움을 주었고 결국은 그녀를 권력을 쫒는 여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유모가 죽은 뒤, 가비공주는 어머니를 지지했던 족장들의 도움을 받았고 가장 큰 협력자는 성제관이었다. 성제관은 자살한 명제관의 양아들이었다. 통념상 아버지의 자살을 문제 삼아 아들이 제관직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는 양아들이 아닌가. 그런 그를 적극적으로 제관직에 밀어 준 세력이 왕비였다. 성제관은 제관직에 오른 후, 완벽한 왕비의 지지세력이 되었다. 가비공주는 족장들과 성제관의 도움 속에 궐에서 확고한 위치를 형성해가며 조금씩 왕비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차근차근 세를 규합해가며 궐의 무사들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 갔다. 가비공주의 그런 노력에는 호족장의 협력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가비공주의 세는 자비공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가비공주가 치밀한 노력으로 왕비역할을 수행하는 위치가 되었을 때 풍요가야는 큰가야와 통합을 하게된다.

"가비공주가 너와 결혼한 후 혹여라도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면 어찌 하겠느냐?"
조용왕자는 어머니의 물음에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한번쯤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가비공주에게는 따르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가비공주가 저와 결혼을 하더라도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은 변함없는 음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껏 가비공주가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비공주도 여자인데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길 수도 겠지요. 혹여 저와 결혼한 가비공주에게 남자가 생겨 아이를 가지더라도 이해를 해야겠지요."
이미 조용왕자는 결혼 후에 있을 지도 모를 가비공주의 외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듯 보였다.
"장하구나 조용왕자! 네가 그렇게 넓은 마음으로 가비공주를 이해해 준다니 다행이구나. 네 말대로 나도 가비공주가 지금껏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비공주는 오직 왕비역할이나 나라일에 애정을 쏟고 있지만 따르는 남자들이 너무 많으니 내가 걱정이 드는구나. 남자가 목숨을 바쳐 구애를 한다면 아무리 마음이 꼿꼿한 가비공주일지라도 넘어갈 수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가비공주가 실수를 하더라도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준다면 곧 자신의 본분인 왕비역할로 돌아올 것이다."
매화왕비는 가비공주에 대한 깊은 신뢰를 조용왕자에게 심어주었다. 풍요가야와 큰가야가 통합할 때 호우왕은 번개왕의 후계자로 조용왕자를 지목했다. 다행히 호우왕에 의견은 번개왕과 큰가야 족장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조용왕자가 후계자로 결정되자 매화왕비는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용왕자는 호우왕의 셋째공주 인 들꽃공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평소 매화왕비는 자비공주, 가비공주와 함께 큰가야를 방문하는 들꽃공주에게 한번도 말을 건네지 않을 정도로 싫어했다. 조용왕자와 들꽃공주가 사귄다는 소문이 나돌아도 매화왕비는 철저히 침묵하며 들꽃공주를 외면했다. 그렇게까지 들꽃공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매화왕비였는데 후계자가 되는 조용왕자의 배필로 들꽃공주는 가당 치도 않은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매화왕비는 폭풍왕자의 짝으로 가비공주를 생각했었다. 그것은 폭풍왕자를 가비공주의 배필로 부탁했었던 호우왕비의 청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였다. 아들 셋중에 가장 출중하고 후계자로까지 내정되어있는 폭풍왕자의 배필로는 모든 것에서 뛰어난 가비공주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풍왕자는 초라한 조건을 가진 여자와 결혼을 강행했다. 가비공주를 둘째며느리로 삼아 가까이 두려 했던 매화왕비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 그러다 조용왕자가 후계자로 정해지자 매화왕비는 자신감을 얻었다. 비록 조용왕자가 병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의 배필은 앞으로 왕비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매화왕비는 조용왕자의 배필로 가비공주를 정하고 그들의 결혼을 성사시킬 결심을 했다.

"아-아-악!"
김효의원은 소리를 지르고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타난 악몽이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꿈에 나타난 일은 오늘이 2번째였다. 첮번째는 번개왕님께서 승하하시고 몇일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꿈속에서 아버님께서는 피를 흘리며 관을 메고 끝없이 걸으시며 계속해서 김효의원을 소리쳐 부르고 계셨다. 너무나 선명한 꿈은 마치 현실과 같았고 깨어서도 섬뜩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때와 똑같은 꿈을 오늘도 꾸었다.
"그렇다! 분명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 하신다. 예전에는 번개왕님께서 승하셨기에 아버님께서 꿈에 나타날 수도 있으려니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였었나 보다. 꿈속의 아버님께서는 어쩌면 나에게 불길한 앞날을 예언해주시는 것인가! 하긴 번개왕님께서 승하하신 후 나의 입지가 많이 좁아진 것은 사실이지"
김효의원은 중얼거렸다. 이런 기분으로 자리에 다시 눕는다 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김효의원은 손수 잠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아직 식솔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 기침하셨는지요?"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일어날 시간이 무척이나 이른 시간임에도 며느리는 방문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김효의원은 결혼한 아들내외와 어린 손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김효의원은 방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냐? 집안 일을 시작하려면 이른 시간인데?"
"요즘 아버님의 안색이 어두운신 것 같아 조금 일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숫물 올릴까요?"
며느리는 김효의원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렇게 하려무나."
세수를 마친 김효의원은 아침준비를 하려는 며느리를 불러 앉혔다. 김효의원은 며느리에게 서찰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는 오래 전 아버지께 받은 것으로 소중히 보관하고있었다.
"무엇입니까? 아버님!"
며느리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 서찰은 우리 집안을 구해줄 귀중한 것이다. 만일 나와 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는 이것을 가신에게 전해야한다. 꼭 명심해야한다."
며느리는 김효의원이 건제는 서찰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며느리에게 아버지의 서찰을 전한 몇일후 김효의원은 폭풍왕자의 측근 내관으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매화왕비와 번개왕께서 염려하셨던 가비왕비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동안 가비공주는 매화왕비의 염원대로 조용왕자와 결혼하였고 번개왕이 죽은 후 큰가야의 왕비가 되어있었다.
"아버님께서 꿈 속에 나타난 것을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역시 아버님께서는 당신이 죽은 뒤의 나라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어"
넋두리에 가까운 탄식을 김효의원은 중얼거렸다. 김효의원의 탄식에는 죽음을 앞둔 번개왕이 자신에게 맡긴 임무를 실천해야하는 중압감이 배어있었다. 김효의원은 번개왕이 자신에게 맡긴 서찰을 가비왕비에게 전하고 직무실로 돌아왔다. 김효의원은 번개왕과 매화왕비의 신임을 받아 큰가야에서 가장 높은 직책인 의원대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는 번개왕의 각별한 지시로 조용왕자와 셋째왕자의 병을 혼자서 치료하였고 진료기록도 혼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특권은 번개왕이 숨지자 의원내부에서 상당한 불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하의원들은 왕실기록을 독단으로 가지고 있는 그에게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효의원은 자신이 보관하고있던 왕실기록을 실수로 분실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김효의원은 의원대장직에서 자진해서 물러났고 직함만 원로의원으로 불리며 겨우 출퇴근하는 처지로 전락되어있었다. 그런 처지의 그가 가비왕비에게 번개왕의 서찰을 전한 것이었다. 이제 김효의원의 방자한 짓은 의원대장에게 보고될 것이다. 가득이나 김효의원을 내쫒지 못해 안달인 의원대장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당장 의원대장은 시녀대장과 협력하여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가비왕비 방을 나온 시녀대장은 궁녀1과 궁녀2를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갔다.
"궁녀1은 원로의원 김효를 제거하는 일을 추진하라. 그 동안 원로의원의 모든 뒷조사를 해 두었겠지."
시녀대장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궁녀1에게 따지듯 물었다.
"예. 그동안 시녀대장님의 지시로 원로의원의 모든 것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를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원로의원은 큰가야 왕실진료기록은 물론 풍요가야 시절 아비에게 전해받은 왕실진료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에게서 물려 받은 풍요가야 왕실기록은 엄밀히 큰가야 의원들에게 넘겨져야 했습니다. 물론 원로의원은 지금껏 보관하고 있던 왕실진료기록들을 모두 분실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말은 거짓일 것입니다. 분명 그는 모든 왕실진료기록을 숨겨둔 채 혼자서만 연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궁녀1은 확신에 찬 어조로 답변했다.
"연구목적으로 왕실진료기록을 틀어쥐고 있다면 다행이지요. 천하의 명의라고 칭송이 자자한 원로의원이 겨우 혼자서 연구하자고 풍요가야와 큰가야의 왕실진료기록을 움켜쥐고 있었을까요? 겨우 그것 때문에 의원내부의 불만까지 무릅쓰고 진료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수상하지요. 그는 언젠가 왕실진료기록을 이용하여 왕실의 약점을 틀어 쥐려는 계획일 것입니다. 족장들 일부는 원로의원의 그런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겠지요. 그들은 언제라도 원로의원과 결탁하여 왕실진료기록을 발판 삼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려 하겠지요. 족장들과 원로의원이 결탁하여 왕실진료기록을 백성들에게 이용하면 어떨까요. 그들이 왕실에서 썼던 보약과 질병을 공개하면 과연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백성들은 호우왕가와 번개왕가가 보약에 찌들고 병약함에 절었다며 맹렬히 비난하겠지요. 족장들과 원로의원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왕실이 심한 전염병에 걸렸었다고 현혹할 수도 있겠지요. 왕실진료기록을 혼자서 보관하고 있는 원로의원의 행위는 이 정도로 크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중죄이며 반역입니다."
궁녀2가 원로의원의 행동을 강하게 성토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하루 빨리 진의를 밝히고 원로의원에게서 왕실진료기록을 되찾아야 합니다."
궁녀1도 거들었다.
"원로의원이 가지고 있던 왕실진료기록의 일부는 나의 손에 들어와 있다. 몇년 전에 내가 원로의원 집에 자객을 보내 움쳐 두었지."
시녀대장이 자신감있게 말했다.
"이참에 원로의원은 물론 그를 돕고 있는 족장들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리지요."
궁녀2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것없다. 원로의원 하나 제거하는데 일을 그렇게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다. 원로의원을 반역죄로 몰아 넣으면 그를 감싸고 있는 족장들은 자신들이 걸려 들까 노심초사 할 것이다. 원로의원의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번질걸 우려하는 족장들을 우리는 감싸 안으면 된다. 그러면 그들은 알아서 원로의원의 죄를 더욱 가중하게 만들어 깨끗하게 없애줄 것이다. 즉 우리는 원로의원의 명백한 반역죄를 제시하기만 되는 것이지. 원로의원의 단죄는 우리가 감싼 족장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시녀대장은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차갑게 말했다.

퇴근해 오는 김효의원을 향해 아들이 뛰어왔다.
"아버님, 궐에서 나온 자들이 집안의 물건을 뒤지고 서류를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아들은 김효의원을 기다린 다급하게 말했다.
"제어멈은 무사하느냐? 제어멈에게 맡긴 봉투는?"
김효의원은 식솔들의 안위보다 며느리에게 맡긴 서찰을 더 걱정했다. 제는 김효의원의 어린 손자이름이었다.
"제어멈과 봉투는 잘있습니다."
아들은 서찰을 걱정하는 김효의원을 안심시켰다. 김효의원과 아들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가구들이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었고 넋나간 듯 앉아있던 며느리는 김효의원을 보자 눈물을 흘렸다.
"어멈아, 너는 빨리 서찰과 제를 데리고 몸을 피해라. 태백산에 있는 나와 절친한 약초꾼에게 가거라. 그가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어서 떠나라!"
김효의원은 울고있는 며느리에게 재촉했다.
"어르신 어서 피하십시오. 이번에는 궐의 무사들이 오고있답니다."
집안의 가솔이 뛰어와 알려 주었다.
아! 이렇게 빨리 들이 닥치다니! 어멈아! 어서 제의 입을 틀어막고 어서 광속 토굴로 숨거라!"
김효의원은 그동안 만약을 대비하여 광속 깊은 곳에 토굴을 파 두고 있었다. 시아버지의 불호령에 며느리는 서둘러 어린 아들을 안고 광속으로 들어갔다. 얼마있지 않아 궐의 무사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반역을 저지른 원로의원과 그 가솔들을 모두 포박하라!"
며느리는 광문 틈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체포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남아있는 무사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려하자 며느리는 재빨리 토굴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원로의원 가솔들은 모두 잡아 들였느냐?"
태백산으로 떠난 시녀대장을 대신하여 궁녀1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궁녀1은 시녀대장이 돌아올 때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긴 늙은 의원 하나와 그의 아들, 며느리, 피덩이 손자까지 겨우 네명 잡아들이는 일이야 간단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궁녀1은 조바심이 났다.
"원로의원은 늙은 여우다. 그의 아비는 더욱 지독했지. 그러니 원로의원 잡아들이는 일을 신중히 해라"
태백산을 떠나며 신신 당부하던 시녀대장의 당부가 아니라도 궁녀1은 원로의원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풍요가야 시절부터 왕실에 총애를 받았던 명의 가문이 아닌가! 그런 자를 잡아들이는 일인데 호락호락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그는 아들이나 며느리를 이용하여 다른 살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들이 살길을 찾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처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궁녀1은 초조했다.
"며느리와 어린 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며느리는 마을 전체를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찾겠습니다."
수하 궁녀들과 무사들의 보고였다.
"찾아야 한다. 원로의원이 빠져나갈 방도를 며느리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가비왕비님께 도전할 작정을 했다면 그는 분명 살아날 방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원로의원은 가비왕비님과 우리들의 약점을 며느리에게 주고 도망시켰을 것이다. 찾아라! 며느리가 폭풍왕자님이나 가신님을 찾아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원로의원 가족 뿐 아니라 시종 시녀들까지 남김없이 잡아들여라. 원로의원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큰가야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궁녀1이 다그쳤다.
"잘 알고 있습니다. 평소 원로의원과 친분이 있는 약초상과 태백산에 흩어져 있는 약초꾼까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궁녀2가 궁녀1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일을 빠르게 진행시켜라. 며느리의 화상을 그려 신고하는 자에게 상금을 후하게 준다 일러라."
궁녀1이 궁녀2에게 재차 당부했다.
"족장들 사이에서 원로의원과 그의 식솔들에 대한 처단의견이 나누어져 있답니다. 원로의원에게 자결할 수있는 기회를 주자는 온건파와 목을 메 달으라는 강경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약으로 죽이자는 의견입니다. 아무래도 백성들 보는 앞에서 목을 메 죽이는 것은 심하다는 의견입니다. 원로의원이 번개왕님의 총애를 받았고 그의 아비도 호우왕님의 신임이 두터웠고 또 의술에 기여한 바도 크고 해서 독약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궁녀2가 말했다.
"의원하나 죽이는데 목을 메 달든 독약을 먹이든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지. 그저 빨리 죽이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내가 직접 우리 편 족장들을 만나 다수가 주장하는 약을 먹이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자고 부탁하지. 그러나 원로의원에게 자결할 기회는 절대 줄 수없어! 원로의원은 왕실을 무너트리려는 반역을 꾀한 자이니까!"
궁녀1이 단호히 말했다.

며느리는 토굴에서 열흘을 보냈다. 토굴에는 평소 시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식량이 있었기에 지내기엔 별 문제가 없었다. 열흘이 지난 밤 며느리는 어린 아들을 엎고 토굴을 나왔다. 다행이 집에는 지키는 무사가 없었다. 며느리는 말을 구할 돈은 충분했지만 탈줄 몰랐기에 시아버지와 절친한 태백산의 약초꾼 집까지 걸어서 가야했다. 시아버지의 말로는 태백산 약초꾼은 가족과 함께 태백산에서 산다고 했는데 며느리가 그의 집에 당도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며느리가 보기에 약초꾼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싶었다.
"가족은 마을로 이사를 갔고 약초꾼은 약초를 캘 때만 기거를 하지요. 어디서 온 분이시오?"
지나가던 사낭꾼들이 약초꾼의 근황을 알려 주었다. 며느리는 다른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 약초꾼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며느리의 기대는 길지 못했다. 며느리가 아이를 재워 놓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 시녀대장이 무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태백산 약초꾼 집을 찾는 수상한 여인을 신고하라는 방을 본 사냥꾼이 신고를 한 것이었다.
먹을 것을 구한 며느리가 집 가까이 왔을 때는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이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며느리는 절망했다. 아이는 낮선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런데 집안에 있는 아이는 작은 칭얼거림도 내지 않고있었다.
"아! 이미 내 아들은 저 놈들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래! 내 이 서찰을 무슨 일이 있어도 가신님께 전할 것이다. 가신님께 못 전한다면 태백산스승님께 무예를 배우고 있는 활왕자님께 라도 전할 것이다."
분노를 토하며 며느리는 가슴에 품고 있는 서찰을 매만졌다. 아들을 잃는 어미의 울분이 너무도 컸던 것이었을까! 며느리는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급한 마음을 가득 담은 채 태백산 꼭대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 년이다! 죽여라!"
무사 중 한명이 도망가는 며느리의 발자국을 감지하고 소리쳤다. 모든 무사들이 울창한 태백산 숲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며느리를 일제히 뒤쫒기 시작했다. 태백산의 호랑이라도 단숨에 잡아 버릴 수있는 궐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이 집안일만 하던 며느리를 잡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무사들 시야에 가파른 태백산을 빠르게 올라가는 며느리가 들어왔을 때 그들은 전율을 느꼈다. 누군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듯 며느리는 거침없이 태백산 산등성이를 뛰어 올라가고 있다.
"독한 년이다. 포기 할만도 한데! 어차피 정상으로 올라가면 그 다음은 가파른 절벽이다."
시녀대장의 말대로 며느리가 죽은 힘을 다해 올라간 태백산 정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던 태백산스승도 무예를 닦는 활왕자와 가이공주까지도 태백산 정상 어디에도 없었다.
"저의 집안을 살려 주어야 합니다. 저의 원한을 풀어 주셔야 합니다. 저와 집안을 구해 줄 태백산스승님이시여 어디에 계십니까?"
며느리는 정상에 주저 앉아 울부짖었다.
무사들이 올라왔다. 며느리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순순히 우리의 칼에 목숨을 맡겨라!"
시녀대장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며느리는 가슴에 품었던 서찰을 꺼냈다.
"시아버님께서 물려준 이 서찰의 내용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에 알릴 것이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며느리가 악을 써댔다. 며느리는 서찰내용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칼을 빼든 시녀대장이 독기를 품으며 며느리에게 빠르게 덮쳤다. 궐의 무사들과 견줄 만한 무예를 지닌 시녀대장의 칼을 며느리는 한 번의 몸놀림으로 피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시녀대장과 무사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며느리는 태백산 아래를 향해 뛰어내린 것이었다.
떨어지는 동안이도 며느리는 빠르게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며느리는 서찰에 쓰여있는 모든 글자를 가슴에 세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상에서부터 땅으로 떨어지는 동안 한 순간도 그녀는 정신을 놓지 않은 채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다행이 태백산은 서찰의 끝부분의 글자까지 놓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드디어 며느리의 정수리가 땅에 닿았다. 머리와 목이 완전히 접히며 가슴이 바위에 놓여졌다.
"퍽-------"
그녀의 두툼한 살점들이 바위에 얻어지는 소리가 태백산을 울렸다. 살점들이 흩어지며 쏟아 내는 피속으로 그녀의 손에 든 서찰이 빨려 들어갔다. 붉게 물들어 가는 서찰은 피와 살점들로 엉켜가며 토막 난 시체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시녀대장과 무사들이 시체를 확인하러 왔을 때는 형체를 분간할 수없는 피덩이들이 뒹굴고 있었다. 눈을 부라리고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없었고 찢겨진 짐승의 살점만이 흩어져 있었다.
"시체를 수습할 필요가 없겠다. 사람의 흔적인지, 짐승의 흔적이지 모르겠구나! 이 살점들도 곧 깨끗이 청소가 될 것이다. 태백산에는 굶주린 맹수가 많지! 자, 모두 궐로 돌아가자!"
시녀대장의 외침이 저물어 가는 태백산을 울렸다.

2002년 4월 3일 새벽
"전생에 김선생님의 가문을 모살시킨 장본인을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김선생님 가문을 몰살시켰던 사람이 지금 환생해서 살고 있어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나의 물음에 김선생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미동도 않는 김선생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지금껏 나에게 전생을 물으며 궁금해 했던 김선생님이 아니였던가? 하긴 김선생님은 자신의 전생을 듣고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걸요!"
감긴 눈을 뜨지 않았지만 김선생님은 단호히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김선생님은 내가 쓰는 글에 그렇게 관심을 보였어요? 왜, 가비가 진짜 공주가 아니라고 나에게 그토록 강조했어요!"
가비를 신날하게 비난할 때와는 너무도 다른 김선생님의 태도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김선생님에게 신경질적으로 질문했다.
"지난 일이지만 진실을 밝히고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었지요."
이천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차안에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김선생님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근 한달 동안 김선생님은 이천으로 돌을 주우러 가자며 나를 졸랐었다. 돌이야 가까운 청계산에도 널려있건만 김선생님은 굳이 이천으로 가자고 했기에 나와 진숙은 시간을 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이천에서 살고있는 재미난 아저씨를 만났고 김선생님과 진숙, 나는 밤 공기를 가르고 이천을 다녀오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새벽 공기는 무척이나 찼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새벽공기는 가비공주의 진실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처럼 날카롭게 내 모습을 비춰주었다. 그렇다. 나는 가비공주를 쓰며 항상 차가운 바람 속에 싸여있었고 서러움에 묻혀지냈었다. 집안 곳곳이 가비공주의 지난 일들을 밝혀야 하는 내 자신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차곤 했었다. 특히 수련의 죽음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자신을 잊어 달라는 수련의 마지막 유언을 적을 때는 절망이었다. 사소한 소설내용으로 회의와 절망까지 느꼈음에도 나는 아직도 가비공주의 이야기가 허구라고 말하고싶다. 가비공주와 나와 김선생님, 그리고 진숙, 방송국감독, 할아버지나무, 돌할머니 등 많은 이들과 겪었던 사건들이 어쩌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사소함으로 치부하고싶다.
"내 전생은 뭐예요?"
내가 전생에 대한 책을 냈다는 말에 재미난 아저씨가 질문했다.
"나무꾼이요"
톡 쏘아 붙이는 나의 말투에 진숙과 김선생님이 재미난 아저씨의 반응을 주시했다. 재미난 아저씨는 대학강의와 많은 사회활동을 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분에게 뜬금없이 나무꾼이 전생이라니!
"히히히히히~~~~~ 맞어! 나는 전생에 나무꾼이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농사짓는 전원생활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정말 서울은 너무 싫어! 나는 나무를 하면서도 열심히 책을 본 나무꾼이었을 거야!"
재미난 아저씨는 마치 나무를 하던 자신의 전생을 회상하듯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 아저씨는 지금껏 지식인의 역할에 지쳐 있었구나! 아저씨에게는 나무꾼인 전생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내 전생은 뭐니?"
뭐가 뛰면 뭐도 뛴다더니 이제는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된 진숙까지 자신의 전생을 궁금해 했다.
"선녀!"
나는 조금의 망서림없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잉, 선녀, 세상에 선녀가 어디있어! 선녀가 전생인 사람도 있어?"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대상을 들먹이는 나의 태도에 진숙은 황당해 했다.
"그럼. 천사인 전생도 있고 관세음보살인 전생도 있는데! 티벳트, 달라이라마의 전생이 관세음보살이잖아. 진숙의 전생은 선녀야. 네가 전생에 선녀였으니까 현실감각이 없잖아. 돈에 해서도 남자에 관해서도 아는 게 없고 버스도 못 타고 지하철도 못 타고 도대체 힘든 현실을 싫어하찮니. 선녀가 뭐 하는 일이 있니. 꽃밭에서 놀다가 심심하면 인간세상으로 목욕이나 하러 내려오지."
나는 선녀와 진숙의 성격을 빗대어 조목조목 찔러 주었다.
"호호호, 정말 선녀랑 나랑 좀 비슷하네. 나는 꽃밭에서 노는 것이 너무 좋아. 그래서 내가 꽃꽂이를 좋아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잖아. 그럼 나는 영원히 영악해지지 못하고 현실도 잘 모르는 채 살아야 되는 거니?"
항상 자신의 성격이 모질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던 진숙이 힘없이 물었다.
"선녀가 전생이었던 너는 싫은 사람 좋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다정하게 받아들이잖니. 프랑스박사쯤 되면 깐깐할 만도 한데 너는 그런 것이 전혀 없잖아. 너를 한번만 만나 본 사람들은 너의 너그러움과 포용력에 편안함을 느끼고 마음속의 고민까지 털어놓고 의논하잖아."
나는 오래 전부터 느꼈던 진숙의 장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영선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선녀의 전생이 좋은 점도 있네."
어느새 진숙은 믿지 않았고 부정하고 있었던 전생을 작은 부분이나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새벽공기의 차가움도 밝은 웃음 속에 묻혀 버렸고 가슴에 박혀 있었던 절망, 의심, 회의가 조금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김선생님의 전생은 가비공주 지시에 의해 가문이 몰락한 원로의원의 며느리였다. 가비공주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 준 이는 시녀대장이었고 그녀는 현재 스님으로 환생해 있다. 물론 그 스님은 자신의 전생을 모를 것이고 나도 환생한 시녀대장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다. 전생을 기억하고 전생의 사건이 현실에서 이어지는 신비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김생님도 자식, 남편, 돈에 고민하는 평범한 아주머니이다. 전생과 영혼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있는 나도 과연 전생과 영혼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단지 한탕주의와 뭉칫돈이 떠도는 우리의 각박한 현실속에 전생과 영혼이란 그저 웃고 넘기는 여유로 자리잡길 기대해본다.

번호	제 목		이름	첨부	작성일	조회

127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7) 다음에		은영선		02/18-12:36	2030

126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6) 다음에		은영선		02/18-12:35	1962

125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5)		은영선		02/18-12:33	2617

124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4)		은영선		02/18-12:32	2246

123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3)		은영선		02/18-12:28	3128

122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2)		은영선		02/18-12:26	2417

121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1)		은영선		02/18-12:23	3433

120	신비로운 가이공주	1	내원산방		12/03-21:22	2633

119	내원산방	2	김세중		12/05-13:42	2379

118	보현님 확인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1	내원		12/20-12:07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