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은영선 (youngsuneun@naver.com)
2004/2/18(수) 12:26 (MSIE6.0,Windows98) 220.75.188.178 1024x768 |
 가비공주와 나 그리고 환생(2) (가비공주의 묻혀버린 진실을 찾아서) 명제관의 장례는 태백산에서 화장으로 처리했다. 그동안 왕실의 일원인 제관장례는 왕과 견줄만한 위엄을 갖추어 행해졌었다. 제관의 장지는 왕릉처럼 길지(吉地)에 마련 되었고 원하는 땅에 묻힐 수있었다. 그러나 명제관은 자신의 시신을 태백산에서 화장하도록 유서에 남겨 놓았다. 화장이 명제관의 유언이었지만 호우왕과 호족장은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지금까지 제관을 화장한 전례가 없었고 자칫 명재관의 화장이 선례를 남길 수있다며 최후의 순간까지 막고 나섰다. 그러나 명제관의 유서를 받은 의원대장 김의원이 목숨을 걸고 청했기에 호우왕도 승낙하고야 말았다. 다행이 김의원 말대로 명제관의 장례는 우려없이 무사히 치러졌다. 족장들과 백성들은 풍요가야를 위해 화장을 선택한 명제관을 이해하며 애도했다. 장례식 내내 명제관을 애도하는 백성들 표정을 보고서야 호족장은 내심 마음을 놓았다. 호족장이 이토록 명제관장례까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었다. 그는 풍요가야에서 가장 막강한 족장이었고, 대대로 호우왕실에 충성했다. 풍요가야 족장들 중, 호우왕실에게 충성하지 않는 가문은 없었지만 호족장의 충성심은 유독 특별했다. 그는 호우왕실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났고 하찮은 것까지 챙기며 신경썼다. 호우왕 또한 호족장에게는 신임을 넘어서 의지하는 차원이었다. 다만 둘의 각별함은 다른 족장들에게 표나지 않도록 유지하고 있었다. 호우왕에게 각별한 존재인 호족장은 가신의 아버지였다. 장례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자 호족장은 김의원과 시간을 가질 수있었다. 호족장은 명제관이 양자를 제쳐두고 굳이 김의원에게 장례를 부탁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김의원은 풍요가야의 의원대장으로 그의 명성은 큰가야까지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김의원은 풍요가야에서 의원으로 명망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명의 집안 출신답게 그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의술은 물론 학문과 역학, 복술까지 능통했고 성격 또한 호탕하여 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박식함과 인정 넘치는 대인관계로 다양한 계층과 친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호우왕과 왕비의 두터운 신임은 물론이고 큰가야의 번개왕에게까지 왕진을 갈 정도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외아들은 큰가야에 초빙되어 의원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외가 쪽이라도 왕실의 피를 받았다면 제관직이 내려졌을 거란 소리까지 나왔다. 김의원과 명제관은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소 형님 아우하는 사이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명제관이 풍요가야의 많은 친분 중에 굳이 김의원에게 장례를 부탁한 것이 호족장은 내심 의구심이었다. 대부분의 족장들이나 백성들은 명제관의 특별한 장례식은 물론 죽음에 대해서도 작은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역대 제관과는 사뭇 달랐던 생전의 명제관 성품과 생활 때문이었다. 제관은 나라의 제사를 주관하는 직책으로 왕실과 백성을 위해 풍요를 기원하고 불행을 쫒는 것이 임무였다. 그런 제관의 역할을 수행하려면 여러가지 금기사항과 엄격한 규칙 속에 기도와 수련으로 생활해야 했다. 엄격한 직책임에도 제관은 결혼하여 부인과 자식을 둘 수있었다. 제관은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힘은 왕과 견줄 만한 위치였다. 제관은 왕과 족장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특성상 마음만 먹는 다면 얼마든지 권력을 휘두를 수있는 위치였다. 그런데도 명제관은 권력과 부, 왕실의 특권, 신의 계시를 받는 절대적인 힘을 묻어두고 살았다. 그는 검소한 삶 속에서 정치를 멀리하며 수련과 기도를 철칙으로 삼았고 학문하는 이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제관의 권위보다 농부의 소박함을 추구했고 왕족보다는 백성들의 손을 잡고 축원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풍요가야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명제관인데도 그에게는 언제나 방황과 쓸쓸함을 달고 다녔다. 명제관의 아버지는 자신의 직책에 만족하며 평생을 기도와 엄격한 규율 속에 살았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명제관은 가정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 명제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오직 기도와 규칙, 훈련을 강요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명제관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가정에서 자라는 자신의 저지를 비관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자신 또한 차가운 결혼생활을 해야하는 재관의 핏줄이라는 현실이 성장하는 내내 가슴을 짖 누르는 아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명제관은 왕실의 법도에 따라 제관직에 올랐다. 제관직에 오른 명제관은 풍요가야를 위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가정을 갖는 건 외면했다. 자신에게 결혼은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며 자식에게도 제관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명제관은 왕실에서 제관직을 희망하는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족장들과 백성들은 생전의 명제관생활을 떠올리며 화장을 택한 그의 선택을 당연시 여겼다. 그러나 호족장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백성과 어울리며 살았던 명제관일지라도 평생 그는 제관직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제관은 역대 제관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화장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는가! 호족장은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섬뜩한 두려움을 느꼈다. 분명 명제관의 죽음에는 엄청난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의원은 명제관께서 자살한 이유를 알고 있겠지." 호족장은 무거운 말문을 열었다. "풍요가야와 큰가야의 가뭄은 명제관님께서 부정을 저지른 탓이었네." 호족장은 단호함이 배어있는 김의원의 답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일 김의원의 말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는 참형을 면할 수없지 않은가! 어떻게 감히 호우왕께서도 인정한 명제관의 죽음을 부정을 저지른 죄과라 할 수있단 말인가? 더욱이 평소 풍요가야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명제관에게! 호족장은 끌어 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다시금 김의원에게 물었다. "풍요가야와 큰가야의 가뭄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명제관의 부정 때문이라! 절대! 결코! 나는 믿을 수없어! 도--대-체!, 명제관님의 부정이 무엇이 길래 풍요가야와 큰가야에 가뭄까지 들게했단 말이가? 그래, 풍요가야와 큰가야의 가뭄을 있게 한 명제관님의 부정이 무엇인가?" 몸을 떨어가며 다그치는 호족장의 태도에도 김의원은 태연했다. "작년 가을 국가제사를 앞두고 명제관님과 수련이 정을 통했다네. 물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오래되었지. 그러나 정을 통한 것은 제사를 앞둔 작년 가을이 처음이었지." 김의원의 말에 호족장은 더 이상 이성을 찾을 수없었다. "명제관님과! 수-련이! 정을 통했다! 그-것-도! 나라의 제를 앞두고! 그--럴-리가! 어-떻-게, 그런 일이!" 호족장은 머리를 바닥에 박고 눈물을 흘리며 더듬거렸다. "사실이네. 명제관님은 자신이 저지른 부정에 조금이라도 죄값을 치르기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지." 김의원은 더욱 차갑고 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렇다면,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태를, 명제관의 일을 어찌 수습해야 된단 말인가? 지금에 와서, 이미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호족장은 실성한 듯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아닐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호우왕님을 비롯한 모든 족장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라의 제사를 다시 지내면 된다네. 제사 형식은 이렇다네. 메말라 버린 강옆에 큰 구덩이를 파게. 구덩이 속에 풍요가야에 있는 마른짚을 모아 태우게. 마른짚이 타는 구덩이 옆에 의관을 갖춘 호우왕님과 족장들이 밤, 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에 기도를 드려야 하네. 명심할 것은 기도 기간동안 뜨거운 죽을 한끼만 먹어야 하네. 기도 기간은 5일일세." 김의원은 명쾌하게 명제관의 일을 수습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불구덩이 옆에서 5일 동안이나 밤, 낮으로 기도를 한다! 더욱이 이 더위에! 뜨거운 죽을 먹어가며 기도를 한다! 그래, 해야지, 풍요가야와 큰가야가 산다면 나를 비롯한 족장들이 불구덩이에서 무엇을 한들 어떻겠나? 설사 불구덩이에 목숨인들 못 던지겠는가! 그러나 호우왕님은 아니 되네! 의관을 갖춘 호우왕께서 짚이 타는 불구덩이 옆에서 기도를 하다니! 절대 호우왕님께 그런 고행을 행하시게 할 수는 없어!" 정신을 가다듬은 호족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도 그 방법 밖에 없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올해는 물론이고 내년, 내 후년 가을까지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걸세. 시간과 공간은 음양의 흐름을 타는 법이지. 물론 인간의 몸에도 음양의 흐름이 있어. 제사는 나라의 음양흐름을 더욱 원활히 하고 기를 강하게 하기위해 왕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흐르는 음양을 하나로 모아 기원하는 의식이지. 그런데 나라의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이 음양의 흐름을 깨트린 것이야. 불은 설명이 필요없는 강력한 존재지. 불은 악귀와 병을 쫒음은 물론 작은 방심만으로도 행복과 부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있는 절대적이고 엄청난 대상이지. 그러면서도 불은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어. 가장 흔한 예로 불이 지나간 자리에 씨를 뿌리면 큰 수확을 거둘 수있지. 짚은 음식을 만들고 아기를 낳을 때도 쓰이는 것으로 부정을 없애 주는 신성한 물건이지. 이렇게 신성한 불과 짚이 결합하면 풍요가야를 두껍게 덮고 있는 명제관님의 부정쯤은 깨끗이 사라지게 할 수있지. 5일 동안 짚을 태우는 열기는 풍요가야에 내려진 3년의 가뭄을 대신하게 되지. 원래 강한 양기와 건조가 맹위를 떨치게되면 음기와 습기가 찾아오기 마련이야.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지. 그리고 호우왕님과 족장들이 의관을 갖춰입는 것은 반성과 정성을 뜻하는 것이지. 명제관님과 수련의 죄를 호우왕님과 족장들이 대신 반성하여 하늘에 정성을 마치는 것이지. 명제관님과 수련의 부정은 풍요가야에 그토록 엄청난 죄악을 끼친 것이지. 호우왕님과 족장들이 5일 동안 힘들겠지만 꼭 비는 내릴 걸세.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치밀하게 짜여진 자연의 천기를 김의원은 마치 남의 이야기인 듯 너무도 쉽게 말했다. "수련은 어찌해야 하나? 살려 두어도 되겠는가?" 수련을 살려 두어도 되겠느냐는 호족장의 질문이 진심이 아닌 것은 김의원도 알고 있었다. 김의원이 수련을 살리려해도 호족장이 더 반대할 것이다. "풍요가야는 물론 큰가야까지 엄청난 불행으로 몰아넣었는데 당연히 찾아내어 죽여야겠지! 수련이 가진 아이까지도 말일세!" 지금껏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김의원이 단호한 결심을 알리려는 듯 주먹을 쥐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수-련이, 아-이를, 가졌다고! 그렇다면, 명제관님의 아이란 말인가? 아, 수련이 명제관의 아이를....." 호족장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의 탄식에는 명제관의 핏줄을 죽여야 한다는 자괘감이 배어있었다. 김의원은 나약해지려는 호족장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수련의 아이일세! 명제관님을 자살에 이르게한 수련의 아이란 말일세! 호우왕비님께서는 수련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계실걸세. 만일 수련의 아이를 살려둔다면 풍요가야는 물론이고 큰가야까지 엄청난 불행을 가져올 인물이 될 것이야!" 수련! 명제관과 정을 통하고 풍요가야에 큰 죄를 지은 여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호우왕비의 특별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었다. 호우왕비는 세력가 족장의 딸로 유복한 집안출신이었다. 호우왕비어머니는 유모와 그녀의 딸을 혈육처럼 생각했다. 아래사람을 자상하게 대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왕비는 유모와 그녀의 딸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호우왕과 결혼한 왕비는 유모를 궐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유모는 궐에 들어 온후 얼마되지 않아 왕비의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왕비어머니의 병수발을 위해서였다. "하늘이시여! 왕비님어머니께서 병이 낫는다면 제가 대신 죽음을 받겠습니다." 유모의 정성 어린 간호와 애절한 기도는 효력을 발휘했다. 병으로 죽어가던 왕비어머니는 정신을 차렸고 다음날 유모는 쓰러져 죽었다. 왕비어머니는 유모의 정성을 왕비와 호우왕에게 전했다. 호우왕은 유모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모남편에게 족장 지위를 하사하게 된다. 왕비어머니의 죽음을 대신한 유모의 유일한 혈육이 수련이었다. 왕비는 수련보다 몇일 일찍 태어났다. 왕비어머니는 자신과 비슷하게 출산한 유모를 배려하여 아이 보는 여인을 하나 더 두었다. 그러나 유모는 자신의 딸 수련보다 왕비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았다. 다행이 수련은 자라면서 어머니의 그런 행동을 당연시 여겼고 그녀 스스로도 왕비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남자 형제들 틈에 외딸로 자란 왕비 또한 수련을 친구처럼, 동생처럼 아껴 주었다. 호우왕비가 결혼하여 궐로 갈 때 수련도 따라가길 청했다. "왕비님, 부탁입니다. 저는 왕비님을 모시며 평생 결혼하지 않는 궁녀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왕비님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수련은 왕비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왕비는 또한 수련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궐에서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왕비의 뜻과 수련의 청은 호우왕어머니인 대왕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궐로 들어와 권력을 얻으면 나라를 흔들 요망한 여자!" 대왕비가 역술가에게서 얻은 수련의 점괘였다. 왕비는 혼자 남은 가여운 수련을 위해 족장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왕비님 저는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저의 남은 생은 수도자가 되어 부모님 명복을 빌며 살고 싶습니다." 결혼을 추진하는 왕비에게 수련이 보낸 서찰이었다. "가여운 나의 수련! 내가 풍요가야의 왕비가 되었는데도 수련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구나. 내 어머니를 대신하여 유모가 죽고 이젠 수련마저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된다면 나의 슬픔이 너무 크다. 수련, 제발 나를 위해 내가 추천하는 족장과 결혼해 다오. 족장과 결혼하여 수련이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 것이 내 소원이다." 왕비가 수련에게 보낸 간곡한 서찰이었다. 수련은 왕비의 서찰을 보고 족장과 결혼을 결심했다. 수련의 결혼은 호우왕비 친정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수련의 결혼이 끝나고 호우왕비는 첫아이 자비공주를 낳았다. 아들을 기대했던 호우왕과 시어머니인 대왕비는 자비공주의 탄생을 서운하게 생각했다. "왕비님! 수련의 남편이 임종했답니다." 대장궁녀의 전갈이었다. "무엇이라! 수련남편이! 어쩌다가? 건강하던 사람이 어쩐 일로? 언제 죽었다 하던가?" 자비공주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왕비는 수련의 소식에 놀라 반문했다. "한달 전에 갑자기 쓰러져 죽었답니다. 시부모가 아들의 죽음을 수련의 박복함 탓이라 한답니다." 결혼생활 2년도 채우지 못한 수련의 소식이었다. 그동안 호우왕비는 시어머니의 명령으로 결혼이후 한번도 수련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둘은 편지로만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달동안 수련에게서 연락이 없어 걱정하던 호우왕비는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한 것이었다. "아! 수련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남편이 죽은 것도 서러운데 시부모에게 구박까지 받다니! 이럴 때 내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호우왕비는 실의에 빠져 있을 수련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당장이라도 수련을 궐로 불러들여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왕비는 수련에 대한 애처로움만 간직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수련의 점괘를 믿는 시어머니의 명 때문이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고 수련은 시부모를 모시며 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부모는 남편을 먼저 보낸 박복한 여인과 한집에 살수없다며 수련의 짐을 꾸려서 밖으로 내쫓았다. 수련은 닫친 대문 앞에서 삼일을 먹지도 않은 채 울면서 애원하며 매달렸다. 수련이 시부모에게 쫒겨나 대문 앞에서 울고 있다는 소식은 호우왕비부모에게 전해졌다. 호우왕비어머니는 당장 수련의 시부모에게 갔다. "비록 자식을 잃은 시부모님의 슬픔보다는 못하겠지만 남편을 잃은 수련의 상처도 얼마나 크겠습니까?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 수련이 저리도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겠다고 애원하는데 쫓아 내다니요? 더욱이 남편을 죽게했다는 억지를 부리시는 것이 말이 됩니까? 시부모님께서 수련을 데리고 있는다 해도 제가 그리할 수없습니다. 수련을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왕비어머니는 수련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련은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돌아와 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수련이 호우왕비 친정집으로 온지 1년 후 대왕비가 임종했다. "어머니께서 싫어했던 수련을 꼭 궐로 불러들여야 겠소!" 평소 왕비에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 호우왕이었다. 그러나 수련을 궐로 불러들이겠다는 왕비의 요구에 호우왕은 화를 냈다. 그렇다고 물러설 왕비가 아니였다. 지금 호우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수련은 영영 왕비 곁에 둘 수없기 때문이었다. "대왕비님께서 싫어하셨기에 저는 왕비가 되고서 지금까지 수련을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수련은 저에게 오빠들과 같은 혈육입니다. 저 때문에 수련은 젖도 잘 먹지 못하고 컸습니다. 평생을 제 걱정으로 지낸 수련입니다. 결혼하기 싫다던 수련에게 제가 결혼하라 명했습니다. 결국 저의 잘못 된 명으로 수련은 남편을 잡아 먹은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 곁에 두고 보살펴야 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왕비의 간절한 애원에 호우왕도 생전의 대왕비를 들먹여가며 반대만 할 수없는 입장이었다. 나라를 흔들 요망한 여자라는 것도 역술인의 말만 믿고 대왕비께서 수련에게 씌운 멍에가 아니였던가! 호우왕은 왕비의 소원대로 수련을 궐로 불러들일 것을 허락했다. 시어머니인 대왕비가 죽은 지 석달이 지나서였다. "오! 왕비님! 천한 저를 잊지 않으시고 불러 주시다니요! 수련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왕비 앞에 온 수련은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왕비 또한 수련을 보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왕비는 흐느끼는 수련을 일으키며 손을 잡았다. "수련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이젠 내 옆에서 편안하게 살아야지! 내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호우왕비 곁에서 지내는 수련은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 호우왕비는 수련에게 편히 살라 했지만 수련은 궐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단장했다. 수련은 어릴 적부터 부지런했고 손재주도 뛰어났다. 수련의 그런 행동은 자비공주의 유모를 제외하곤 궐의 모든 궁녀들에게 시기를 샀다. 또한 왕비 곁에서 한껏 총애를 받고 있는 수련은 족장부인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럴 즘, 왕비의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부모를 잃은 왕비는 허전한 마음을 수련에게 의지하며 지냈다. "어쩐 일이오.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앞두고 있는 나를 찾아오다니!" 명제관은 늦은 밤 은밀히 찾아온 수련을 맞으며 짜증을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명제관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성대하게 제사를 준비하고있었다. 자비공주가 4살인 올해 가을에는 풍요가야에 큰 풍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풍요가야와 큰가야는 매년 봄과 가을에 나라를 위한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특히 가을제사는 결실을 거둔 풍성한 시기였기에 나라전체가 축제분위기로 마련되었다.어찌보면 제사는 핑계이고 결실의 풍요로움 속에 족장들과 백성들이 한데 어울려노는 놀이마당처럼 보였다. 나라의 모든 제사는 전적으로 제관이 주관했다. 제사날을 잡고 음식준비를 비롯한 모든 세세한 일을 제관이 감독했다. 더욱이 봄과 가을에 있는 제사는 역대 제관들 모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제관은 제사날을 받아 놓은 한달 전부터 일체의 외부인을 만나지 않는 것이 규율이었다. 그런 명제관 집에 수련이 수도자 변장을 하고 찾아 온 것이었다. "올해 제사가 끝나면 제관직을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제관직을 양자에게 물려주시고 저와 조용한 곳에서 살았으면 합니다." 비정한 결심을 보이는 수련을 보자 명제관은 잠시 짜증이 누그러졌다. 하긴 목숨을 걸고 사랑을 불태우는 수련의 어려움을 명제관이 모를 리없었다. "내가 제관직을 그만두어도 수련과는 이루어질 수없어. 나의 결혼은 호우왕님 허락이 있어야 해. 호우왕님께서는 절대 나와 수련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명제관은 수련과의 결합을 마치 남의 일인 양 공허하게 말했다. 명제관의 눈빛, 말투 어느 곳에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놓아둔다면 필시 명제관은 불가능한 사랑이라며 수련을 설득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살아요. 왕비님께서는 분명히 도와 주실 거예요." 수련이 명제관의 말을 가로막으며 강하게 설득했다. "나는 풍요가야의 제관이오. 제관인 내가 다른 나라로 도망가다니! 있을 수없는 일이야!" 명제관 또한 수련의 뜻을 단번에 짤라버릴 심산으로 강하게 거절했다. "그럼 나는요! 평생 바라만 보며 살란 말인가요! 왜!, 나는 사랑하는 이의 손도 잡지 못하나요! 나도 이제 당신의 품에서 잠들고 싶고, 당신을 위해 아이도 낳고 싶어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잖아요! 왜 당신은 가슴속에서 끓고 있는 나를 향한 사랑을 억누르며 지내려 하나요. 서로에게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도 부적절한가요? 우리의 사랑이 그리도 추잡한 것인가요?" 눈물이 범벅되어 수련은 부르짖었다. 사랑의 고통에 마음이 찢기고 영혼이 타 들어가는 수련의 눈물이 명제관의 얼었던 마음을 녹여갔다. 수련은 10대 시절부터 명제관을 사랑했다. 명제관은 젊었을 때부터 외모가 수려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외모는 제관자손이라는 특수한 신분에 가려져 누구도 입에 올릴 수없는 영역이었다. 명제관은 수련보다 족히 30년은 나이가 많았다. 그런 명제관을 수련은 어린 나이부터 홀로 짝사랑했다. 나라의 제사 때마다 아버지 곁에서 일을 돕던 명제관을 수련은 백성들 틈에 끼어 바라만 보았다. 제사 내내 수련의 눈은 언제나 한없는 그리움을 담아 명제관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다녔다. 수련의 존재는 수많은 족장 딸의 하찮은 시녀였기에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명제관도 제사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수련이 모시는 윗전이 풍요가야의 왕비가 되었다. 수많은 족장 딸들의 시녀에 지나지 않던 수련의 존재가 하루아침에 왕비의 친정식구로 풍요가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왕비가 친 여동생처럼 여긴다는 여인! 요망한 점괘를 지녀 대왕비에게 찍힌 여인! 그렇게 수련을 향한 소문들은 물안개가 퍼지지 듯 백성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수련은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았고 오직 자신의 신분이 명제관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있는 위치로 상승한 것만 생각했다. 왕비어머니는 나라의 제사나 축원을 드리러 제관을 만나러 갈 때마다 수련을 데리고 갔다. 그럴 즈음 수련의 사랑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관직에 올랐다. 수련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명제관에게 드러냈다. 틈틈이 명제관과 이야기할 기회를 찾았고,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수련의 눈길은 따라다녔다. 수련의 불타는 눈빛은 제사가 끝날 때까지 명제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수련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20살이 되기 전에 명제관은 그녀의 애타는 눈길에 화답을 주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던 봄 제사에 수줍음을 담은 소녀의 눈에 명제관은 자신의 눈빛을 맞추어 주었다. 왕의 축사에도 소원을 비는 기도시간에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여인을 드디어 명제관이 알아준 것이었다. 수련은 자신을 바라보는 명제관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 명제관과 수련은 서로에게 보내는 눈길로 작은 인사로 사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몰래 건네는 쪽지로 둘의 사랑은 피어올랐다. 명제관은 평생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그는 스스로의 결심이 죽을 때까지 변함없으리라 확신했었다. 그런 그에게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볼그래한 젖 살 뺨에 아기 티도 벗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는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눈빛을 명제관 몸 구석구석에 박이 놓았다. 처음에는 그냥 당돌한 아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아이는 여인이 되었고 그녀의 눈빛은 햇살보다 더 강렬했고 봄 향기보다 더 유혹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렬한 햇살과 봄 향기의 유혹은 소리없이 명제관 가슴에 그리움으로 심어져 갔다. 이십대의 혈기 넘치던 시절에도 여자를 돌처럼 보았던 그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설레임을 가슴에 품고 한 여인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그리움과 설레임을 알게 해준 명제관의 사랑이 수련이었다. 수련은 자신의 사랑을 명제관이 알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명제관은 수련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부담스러워했다. 하루하루 수련의 깊은 사랑을 느낄수록 초조함을 보이며 흔들렸다. 드디어 명제관은 수련에게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통보했다. "평생 명제관님을 바라만 보며 살겠습니다. 맹세할 수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결혼하라는 말은 하지마세요." 수련은 매달리며 애원해보았지만 명제관은 매몰차게 거부하며 일관되게 결혼을 설득했다. 결혼을 종용하는 명제관의 차가움에도 수련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즘, 호우왕비가 수련에게 족장과의 결혼을 명했다. 어머니를 잃고 외로이 있는 수련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는 왕비의 편지를 읽고 수련은 머리를 감싸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제는 더 이상 사랑만으로는 나를 지탱할 수는 없어. 왕비님을 위해서, 명제관님을 위해서 내 사랑을 놓아 버리는 거야." 울음을 멈춘 수련은 삼일동안 물도 넘기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련은 주위의 모든 권유와 자신에게 다가올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련은 왕비님과 명제관님을 위해 태어난 몸입니다. 그런 저에게 왕비님도 명제관님도 결혼을 하라 명하십니다. 두 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수련의 몸과 영혼은 언제까지나 왕비님과 명제관님의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 수련이 명제관에게 보내온 편지였다. 수련의 결혼식 날 명제관은 처음으로 몸을 학대하기 위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명제관은 수련이 자신을 잊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길 빌었다. 수련의 결혼이후 둘은 서로의 직분에 충실했다. 남편을 대동한 수련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명제관에게도 지나간 사랑의 흔적은 없었다. 둘은 평행선을 유지하며 기나긴 세월을 지나치려 했다. 그렇게 수련과 명제관은 서로의 눈길을 외면하며 하루하루의 삶이 빨리 마감하길 원했었다. 그런데 수련의 남편이 죽은 것이었다. 대왕비가 죽고 왕비의 요청으로 궐로 들어온 수련은 결혼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꿈에도 그리던 왕비를 모신다는 영광과 함께 예전보다 명제관을 만나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 수련을 행복하게 했다.나라의 제사와 축원이 있을 때면 수련은 왕비를 수행하며 자연스럽게 명제관을 가까이서 만날 수있었다. 명제관은 남편을 잃고 돌아온 수련을 가엽게 여기며 미래를 축원해주는 평범한 여인으로 대할 수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련의 사랑이 변함없듯이 명제관의 지나간 사랑도 그의 가슴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금 예전의 감정으로 되돌아 왔다. 남편을 잃고 돌아온 수련은 달라져 있었다. 함께 살자 졸랐고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겠다며 애원했다. 바라만 보며 살겠다던 예전의 수줍은 여인은 사랑을 차지하려는 당찬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명제관은 수련과 자신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 앞에 놓여있는 맹목적인 사랑을 처다보면 더욱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원 치 안은 결혼까지 선택했던 수련을 명제관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또다시 수련을 다른 남자 품으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젠 수련을 떠나 보낸 사랑의 빈자리가 얼마나 싸늘한지는 지나간 세월동안 명제관이 더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명제관은 중요한 제사를 앞두고 찾아온 수련을 되돌려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명제관은 수련을 위로하려 손을 잡았다. 그동안 기도를 해주려 수 많은 여인과 손을 잡았던 명제관이지만 수련의 손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손을 잡힌 수련이 감격과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명제관 품에 안겼다. 명제관은 자신의 가슴을 파고 드는 수련을 뿌리칠 수없었다. 그러기에는 수련이 인내했던 지난 날의 고통스러웠던 사랑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제관 스스로 수련을 갈망하며 참아 왔던 사랑이 무척이나 지독스러웠으리라. 제사 한달 전부터 금욕하는 제관의 규율을 명제관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명제관이 중요한 제사를 15일 앞두고 수련과 처음으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올해부터 양자에게 제사를 맡기길 청합니다." 수련과 밤을 보낸 이틀 후 명제관이 호우왕에게 간곡히 청했다. "올해는 큰 풍년이 든 중요한 해이니 꼭 명제관이 주관하시오. 다음 해부터는 양자에게 조금씩 물려주도록 하오. " 호우왕의 단호한 명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명제관은 모든 제사준비를 양자에게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수련과의 통정을 사죄하는 기도에 몰두했다. 호우왕을 비롯한 족장들과 백성들이 운집한 제사날, 명제관은 떨리는 육신을 억누르고 어쩔 수없이 제사를 주관했다. 다행히 제사를 주관하는 동안은 하늘도 청명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두려운 징후는 풍요가야뿐 아니라 큰가야에서까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봄 제사 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원래 봄 가뭄은 종종있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백성들은 마을마다 협심하여 강물을 퍼다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어도 비는 한방울도 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한여름 내내 백성들은 물을 찾아 농토에 대느라고 아우성을 쳤다. 풍요가야와 큰가야는 물을 찾아 전쟁을 치르듯 겨우 추수를 할 수있었다. "올해는 비도 오지 않더니 겨울이 되었는데도 눈을 볼 수없구나. 눈이 내려야 내년 농사가 풍년이 드는데...." 명제관은 겨울하늘을 바라보며 근심에 젖었다. 명제관 근심대로 어찌된 일인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혹여, 혹시라도, 나의 부정으로..., 아닐거야. 그렇지만, 설사..., 봄부터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나의 부정탓이라면!" 명제관은 겨울 내내 수련과의 관계를 고민하여 지냈다. "우리의 관계가 부정한 짓이라니요? 명제관님과 제가 맺지못할 사이이도 아닌 것을 요!" 가끔 식사도 거르며 자책하듯 중얼거리는 명제관을 보며 수련이 설득했다. 수련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긴 겨울밤 동안 명제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해가 바뀌어 봄제사를 지내고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풍요가야와 큰가야 모두 농사를 지어야 하는 데 비가 내리지 않았다. 호우왕과 번개왕은 수시로 서찰을 주고 받으며 농사를 걱정했고 백성들의 근심은 말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호우왕도 백성들도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명제관 쪽으로 화살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명제관만 조용히 있었다면 지독한 가뭄은 자연현상으로 여기며 누구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명제관은 풍요가야의 미래와 스스로에 대해 점을 쳤다. "세-상-에! 나의 부-부정으로 올해는 물론 내년, 내후년까지 비-가 내-리지 않는다! 4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은 풍요가야는 기근으로 시달리게 된다. 농사기반이 약해진 풍요가야는 결-국에는 이웃나라에 의해 정복된다! 나의 부-정으로, 나와 수련의 부정으로 풍요가야가 굶주림에 시달리다 전쟁으로 없어진다! 아---! 이-일을 어찌! 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면 비내리는 비법을 현자가 깨우친다. 그리되면 풍요가야가 전쟁에 휩 사이는 것은 막을 수있다! 내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면...." 명제관은 자신의 죽음으로 풍요가야가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는 괘를 얻자 안도하였다. 밖으로 나온 명제관은 그동안 수련과의 부정으로 온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에서 벗어난 듯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이미 메마를 대로 말라버린 하늘은 작은 습기조차 느낄 수없었다. 명제관의 부정을 응징하는 하늘을 저 상태로 6개월을 놓아둔다 해도 풍요가야의 땅은 황무지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점괘는 분노의 메마른 하늘이 내후년까지 간다고 하지 않는가! "하긴 내 명이 그리 길지 않아. 60을 넘기면 그만인 운명이지. 조금 더 일찍 죽는다 하여 섭섭할 것이 뭐있는가! 그러나 내 자식은 보고 싶었는데. 수련이 가진 내 아이 의 얼굴만이라도 보려 했는데...." 명제관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호우왕님! 명제관님께서 약을 먹고 자살했다 합니다!" 호우왕은 가뭄 문제로 번개왕에게 보낼 서신을 쓰는 중이었다. 작년은 겨우겨우 추수를 마쳤지만 올해는 심각했다. 나라전체가 거북이등처럼 바싹 말라버렸고 온 나라가물을 구하느라 아우성이었다. 벌써부터 백성들 사이에서는 농사를 포기하고 산으로 가서 풀을 먹으며 연명할거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풍요가야를 비옥하게 만들려했던 호우왕의 평생 신념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가득이나 근심이 깊은 호우왕에게 내관은 생각지도 못한 명제관의 비보를 전한 것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소식에 순간 호우왕은 아무 말도 할 수없었다. "급보이옵니다! 명제관님께서 아침에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내관은 비통한 얼굴로 다시 한번 큰소리로 호우왕에게 고했다. 내관의 고함에 정신을 가다듬은 호우왕이 쓰려던 서신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며 떨리는 소리로 겨우 내관에게 물었다. "명제관이- 명제관이 약을 먹어! 무--엇 때문에, 명제관이 약을 먹고 자살을 했단말이냐! 도대체 무슨 일로 명제관이 목숨을 끊었어!" 호우왕은 탁자를 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울분과 분노가 직무실을 울렸다. "양자의 말로는 작년 가을부터 식사도 거르며 비가 오지 않는 걸 고민했다 합니다. 이번 겨울에는 눈도 내리지 않는다며 거의 실성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양자가 전하기로는 명제관님께서는 가뭄으로 인한 자책으로 목숨을 끊었을 거랍니다. 명제관님께서는 자살하기 전 유서를 호족장님께 보냈다고 합니다." 내관도 눈물을 흘리며 호우왕에게 고했다. "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의 뜻인데 명제관은 어찌 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움직이려 했단 말인가? 비가 오지않는 것을 명제관 책임으로 돌리는 이가 아무도 없거늘 어찌 그런 무모한 짖을 저질렀단 말인가! 어서 빨리 호족장을 불러들이라!" 탁자를 치며 울부짖는 호우왕 소리에 벌써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족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호족장 손에는 구겨진 명제관의 유서가 쥐어져 있었다. "명제관의 유서에는 무엇이라 써있는가?" 호족장을 본 호우왕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유서에는 자신의 모든 장례절차를 의원대장에게 일임한다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의원대장이 말하는 것을 모두 따르라 했습니다. 유서에는 오직 이 말만 적혀 있었습니다." 명제관의 유서를 전하는 호족장도 눈물을 흘렸다. "의원대장! 하긴 명제관이 의원대장과는 막역한 사이였지. 호족장이 알아서 일을 처리하게!" 한마디 의심도 없이 명제관 유서를 따르는 호우왕의 마음을 호족장은 알고 있었다. 약을 먹고 자살한 명제관이 장례까지 전례가 없는 의원대장에게 일임했다. 분명 자살을 하기 전 명제관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음을 호우왕도 짐작하고있으리라. 그렇다고 생전에 신망받았던 명제관을 죽음에 의문이 있다고 조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혹여 자살을 택한 명제관에게 작은 죄라도 나타난다면 그 모든 허물은 풍요가야에 떨어질 것이다. 더욱이 명제관은 왕실의 일원이 아닌가!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하여 호우왕은 명제관 죽음을 덮어두고 혹여라도 잡음이 일어날 시에는 호족장이 깨끗이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호우왕과 호족장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심중을 주고 받을 수있는 각별한 사이였다. "수련이 쓰러지다니! 어쩌다가!" 명제관이 자살했다는 전갈에 이어 수련이 쓰러졌다는 궁녀의 알림이 호우왕비에게 전해졌다. 호우왕비에게는 명제관의 자살 소식보다 수련이 쓰러진 것이 더 급했다. 명제관의 자살에 대해 상세히 알고자 호우왕을 만나러 가려던 왕비는 다급히 수련의 거처로 갔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수련은 시중드는 시녀도 없이 혼자서 누워 있었다. "수련이 쓰러졌는데 시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수련, 몸은 어떠냐? 의원은 다녀갔느냐?" 왕비는 수련에게 이마에 손을 얻으며 물었다. "왕비님 죄송합니다. 주위를 모두 물리쳐주십시오." 왕비 행차에 수련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수련은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수련의 행동에 심각함을 느낀 왕비는 모든 수행궁녀를 처소로 돌려보냈다. "왕비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제가- 제가 명제관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수련은 왕비 앞에 무릎을 꿇고 비통에 졌어 흐느꼈다. 수련의 느닷없는 말과 행동에 왕비는 심한 전율을 느꼈다. "무슨 말이냐? 수련이 명제관을 죽게 만들었다니?" 왕비는 다급하게 수련을 재촉했다. "저와 명제관님과는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머리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숨이 넘어갈 듯 진실을 토하는 수련의 말에 호우왕비는 너무 놀라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서야 왕비는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수련의 비운을 짐작할 수있었다. "명제관과 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오래 전부터! 그랬었구나! 너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사랑이 명제관이었더냐? 가끔 수련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했었다. 수련! 그렇다면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명제관을 사랑하면서도 왜 나의 결혼 명을 따랐느냐? 너는 결혼하기 전부터 명제관을 사랑하고있었겠지?" 왕비는 지난날의 수련을 떠올리며 차갑게 다그쳤다. "그렇습니다. 결혼하기 전, 어릴 적부터 저는 명제관님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제관님은 저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명제관님에겐 가정을 갖는 결혼은 짐이었고 사랑따위는 원치않는 마음의 유희였습니다. 그래서--그래서, 저는 명제관님을 잊으려고 왕비님께서 권하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오- 왕비님! 저는-수련은 진정으로 왕비님께서 명하신 결혼을 감사히 받아들였고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습니다! 물론 남편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수련은 결혼을 권한 왕비님의 명을 한순간도 어기지 않았고, 남편을 싫어하는 마음을 품은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쏟은 남자였습니다. 결혼기간 중에 한 순간이라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수련의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죄를 짖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은 진실입니다." 왕비는 오열하는 수련을 감싸 안으며 한참을 다독거렸다. "믿어 주겠다. 수련의 말을 믿겠다. 나는 수련이 명제관을 사랑한 걸 탓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힘든 마음을 나에게 털어 놓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나에게 모든 걸 말했다면 너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너와 명제관이 맺어 질 수있도록 호우왕님께 간청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 나의 마음을 수련은 믿지 못하였느냐?" 수련의 진심을 묻는 왕비 눈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아닙니다! 왕비님을 믿지못해 숨긴 것이 아닙니다. 저처럼 천한 것으로 인해 왕비님께서 근심하시는 걸 걱정했습니다. 왕비님께서는 결혼 후 줄곧, 대왕비님의 간섭을 받으며 지내셨습니다. 자비공주님을 낳으신 이후로는 왕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더욱 근신하며 지내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왕비님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왕비님께 저의 근심까지 더해 드릴 수없었습니다. 더욱이 명제관님처럼 고귀한 분을 천한 제 따위가 사랑하는 게 대왕비님께 알려지면 왕비님 처지가 더욱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수련은 바닥에 머리를 비벼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왕비는 흐느끼는 수련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오- 가여운 것! 그렇게 힘든 일을 어찌 혼자서 가슴에 품고 있었을 고!" 왕비는 수련을 부둥켜 안으며 한식을 토해냈다. "왕비님, 그런데-그런데-제가 명제관님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분명 왕비는 수련의 말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놀랐다. 수련과 명제관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당연히 아이도 가질 수있는 일인 것을! 그런데도 왕비는 너무나 놀라 말을 더듬었다. "무-엇-이-라! 명-제-관의 아이를 가졌다! 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너는 과부인데 아이를 가지면 많은 이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텐데! 더욱이 명제관의 아이를 가졌다면 족장들이 너를 그냥 놔두지는 않을 텐데....." 왕비는 아이를 가진 수련을 근심하다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곤 이내 비장한 결심을 보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다! 수련 괜찮다! 내가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수련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쉬고 있거라! 명제관 장례가 끝나면 호우왕님께 너의 일을 말해 보겠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련이 가진 명제관 아이를 낳게 할 것이며 궐에서 키울 수있게 만들겠다." 굳고 단호한 표정의 왕비가 눈물을 닦으며 힘있게 말했다. 왕비는 수련을 진정시키고 명제관의 장례를 논의하기위해 호우왕 직무실로 갔다. 다음날 수련이 사라졌다는 궁녀의 전갈이 왕비에게 전해졌다. 놀란 왕비는 수련의 거처로 갔다. 수련은 간단한 옷가지와 여비만 가지고 갔을 뿐 왕비가 하사했던 모든 귀중품들을 두고 떠났다. "왕비님! 걱정 마십시오. 새벽에 떠나는 수련을 만났습니다. 어제 왕비님과 수련의 이야기를 밖에서 들었습니다. 제 직감에 수련이 새벽에 궐을 떠날 것 같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수련은 명제관님 아기를 가진 자신의 일이 호우왕님께 알려지면 오히려 왕비님께서 화를 입을 수있다고 말했습니다. 왕비님께서 호우왕님께 자신의 일을 말하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작정 궐을 떠나려는 수련을 설득하여 제 고향집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제 고향은 태백산 자락이고 집에는 이모님도 계십니다. 제 이모님이 수련을 잘 보살펴 줄 것입니다." 왕비는 정유모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정유모는 모든 것이 치밀하고 확실한 사람이었다. 정유모가 지배계층인 족장일원이 아닌 것이 아쉬울 정도로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비록 자비공주의 유모라는 직분으로 궐에 들온 그녀이지만 왕비의 신임은 대단했다. 왕비는 정유모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고 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그녀 의견을 참고했다. 정유모 또한 자신을 인정해주는 왕비에게 충성을 아끼지 않았다. 왕비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정유모를 호우왕도 인정해주었다. 호우왕이 정유모를 인정해주는 것에는 왕비의 신임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호우왕은 자비공주의 특별한 힘에는 정유모의 젖을 먹인 탓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호우왕이 자비공주의 힘에 숨어 있는 정유모의 공을 인정하는 것은 그녀가 시녀대장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자비공주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시녀대장의 힘도 남달랐다. 아마도 자비공주가 없었다면 시녀대장 힘이 주목받았을 것이었다. 다만 자비공주 힘이 너무 엄청났고 공주라는 지위 때문에 옆에 있는 시녀대장의 힘이 가려져 있었다. 정유모가 그녀의 딸에게만 젖을 물렸다면, 시녀대장이 다른 여인에게서 젖을 얻어먹고 자라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리 되었다면 시녀대장의 힘이 자비공주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라고 호우왕은 확신했다. 그런 점에서 호우왕은 정유모와 시녀대장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유모를 생각하는 호우왕의 미안한 마음은 시녀대장에게 각별한 배려로 나타났다. 호우왕은 자비공주와 마찬가지로 시녀대장에게도 무예 독선생을 붙여주었다. 또한 무예과정, 사용하는 무기, 시중드는 궁녀까지도 자비공주와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주었다. 다행이 호우왕의 배려를 아는지 시녀대장은 배우는 모든 무예에 흥미를 보이며 빠른 속도로 익혀 나갔다. 시녀대장의 무예가 발전하는 만큼 자비공주가 무예에 쏟는 관심은 줄어들었다. 자비공주는 시간이 갈수록 무예보다는 농사와 백성들의 생활에 애정을 보였다. 그런 자비공주를 바라보는 호우왕은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딸도 시녀대장처럼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가뭄으로 쌀이 없어서 다행이지 이 더위에 불을 피워 어떻게 밥을 해먹겠나! 더위 무서워 산에서 풀뿌리 캐 먹는 것이 훨씬 낳아." 더위와 가뭄에 지친 백성들의 하소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제관의 화장(火葬)을 마쳤고, 의원대장이 지시하는 절차에 따라 기우제(祈雨祭)가 거행되어야만 했다. 모든 일들이 왕명으로 내려져 빠르고 강제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우제는 궐과 가까운 말라 버린 강가에 장정들이 구덩이를 파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궐의 무사들은 풍요가야에 있는 모든 짚을 모아 구덩이 옆에 쌓았다. 새벽부터 봄과 가을 제사 때에나 입는 무거운 의관을 갖춘 왕족들과 족장들이 궐로 모여들었다. 강가에 기우제를 지낼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전갈이 궐에 전달되었다. 궐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족들과 족장들이 호우왕을 따라 강가로 나왔을 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에 언제 저리 큰 구덩이를 팠는지 감탄할 여유도 없이 모두들 앞으로 벌어질 일에 오금이 저렸다. 왕족들과 족장들은 불길 옆에서 제를 지낸다는 왕명을 받아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리나 모두들 마음 한구석으로 더운 날씨에 의관을 갖춘 것을 감안하여 짚더미에 작은 불씨나 피우겠거니 생각하고있었다. 또한 기우제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나라를 위한 큰 희생이라 자부하며 지냈었다. 그런데 왕족들과 족장들 앞에 버티고 있는 짚은 흡사 거대한 산을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더욱이 거대한 짚 산은 하나도 아닌 두 개가 아닌가! 호우왕과 호족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지금부터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기우제가 끝날 때까지 누구의 부축도 받지 못한다. 만일 기우제를 지내다 쓰러지거나 실신하여도 그냥 둘 것이다. 절대 부축하거나 약을 먹이지 말라. 기우제가 끝난 후 숨이 끊어진 이들은 시신을 불에 태워 버리고 궐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나도 기우제 도중 죽는다면 시신을 불구덩이에 태워 버려라! 이것은 왕명이니라!" 비장한 결의가 담긴 호우왕 명에 모든 참석자들은 서있기 조차 힘들었다. 여름햇살은 아침부터 이글거렸고 왕족들과 족장들은 벌써부터 현기증이 일었다. 기우제 시작을 알리는 의원대장의 외침과 함께 호우왕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채의 짚더미에 호족장이 불씨를 당겼다. 불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짚더미를 덮어 가며 찬란한 위용을 드러냈다. 짚더미는 불산으로 변하며 한껏 열기를 휘날리며 뿜어댔다. 참석자들은 벌써부터 불산의 열기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옥 불산의 고통이 이런 것이리라! 태양의 심장부가 이 곳이려니! 오!---세상에, 지옥 불덩이도 모자라 뜨거운 죽을 먹고 5일간 버티라니! 어떻게 살아 돌아간다는 생각을 할 수있겠는가?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도 드러눕는 참석자들이 나왔다. 이틀째에 짚더미의 불길이 약해지자 삼일째 아침에 호족장은 또 하나의 짚더미에 불을 당겼다. 왕족들과 족장들은 이틀동안의 열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으련만 두 번째 짚더미 불길은 숨통까지 막아 버리는 것 같았다. 삼 일째 저녁에는 참석자들의 삼분의 이가 쓰러졌고 그 중 반은 의식을 잃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뜨거운 죽을 먹으면 숨 넘어가는 갈증과 현기증이 조금은 나아졌다. 죽은 의원대장이 처방한 약재와 여러가지 곡물을 넣어 달인 치료약이었다. 전쟁터를 누비며 고생한 장수출신의 족장들조차 반 이상 쓰러진 4일째 날에도 호우왕은 앉아 있었다. 왕자시절 잠시나마 태백산스승에게 무예를 닦은 체력과 땡볕에서 몇 날을 지새며 농사를 짓던 호우왕의 집념이 빚어 낸 결과였다. 드디어 5일이 지나고 6일째, 기우제 의식을 끝내고 걸어서 궐로 돌아간 이는 5명 뿐이었다. 호족장, 의원대장, 건강족장, 장수출신 족장, 그리고 호우왕이었다. 가마를 타고 가라는 호족장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호우왕은 궐까지 걸어서 갔다. 그리고 기우제가 끝난지 삼일 후 비가 쏟아졌다. 단비가 풍요가야의 땅과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때 호우왕비는 둘째 아이를 가졌음을 알았다. 자비공주가 특별한 힘을 보였지만 그래도 호우왕은 아들에 대한 작은 미련을 가진 듯했다. 왕비도 첫째는 공주를 보았기에 둘째는 기필코 왕위를 잊는 왕자를 낳고 싶었다. 왕비는 정유모 편에 전해져 오는 수련의 소식을 들으며 안심하고 지내고 있었다. 수련이 숨어지내는 장소는 왕비와 정유모만 알뿐 철저히 비밀로 했다. 어찌 되었건 과부가 아이를 가진 것이니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게 자명했다. 더욱이 아이의 아버지가 명제관이라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은 수련이 궐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도 호우왕에겐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떠난 수련에 대해 묻거나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왕비는 남편의 그런 점이 이상하다 여겼지만 편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원래 왕께서는 수련을 싫어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어느 때는 자신이 먼저 호우왕께 수련에 대해 말을 꺼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남편이 잊고 있을 지도 모르는 수련을 굳이 왕비가 떠올리게 하고싶지는 않았다. 왕비는 수련의 일을 정유모에게 맞기고 자신은 둘째아이의 태교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둘째아이를 가진 내내 호족장이 궐을 자주 드나들었다. 언제나 호족장은 호우왕을 단독으로 만나고 급히 돌아가곤 했다. 자비공주를 좋아한 호족장 아들이 궐을 자주 드나드는 것은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 원래 호우왕과 호족장은 가까운 사이였지만 저렇게 눈에 띄게 단둘이 소곤거리는 일은 드물었다. 호우왕이 풍요가야의 많은 족장들 가운데 유독 호족장만 편애한다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호족장을 시기하는 족장들의 파벌이 형성될 수도 있고, 호족장에게 줄을 서려는 무리들도 생길 것이다. 그런 여러가지 폐단을 아는 호우왕이기에 호족장을 특별히 단독으로 부르는 일은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호족장을 독대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왕비는 직감적으로 둘 사이에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안정하며 둘째 태교에 전념할 자신의 처지에 호우왕에게 일일이 따지며 물어볼 수도 없었다. "왕비님! 아무래도 저의 친정 마을에 궐의 무사들이 온것 같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예감이 이상해서 수련의 거처를 친정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만삭이 가까운 왕비에게 정유모가 말했다. 왕비는 이제서야 남편과 호족장이 갖는 비밀스러운 만남의 이유를 짐작했다. 분명 남편과 호족장은 은밀히 수련을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수련과 명제관의 사이를 알고 있단 말인가? 수련이 명제관 아이를 가진 것도 남편과 호족장이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진정 그렇다면!" 왕비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혹여라도 호우왕께서 수련을 찾아낸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남편은 수련을 죽일 것이다. 왕비에게 수련과의 마지막 이별기회는 고사하고 수련을 찾았다는 언질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게다. 진정 호우왕은 왕실과 명제관의 명예를 위한다며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다. 왕비는 자신이 만삭의 몸을 탓하며 누워있을 일이 아니엿기에 서둘러 수련을 구하기위해 호우왕 직무실로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 때 정유모가 들어왔다. "왕비님! 수련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딸입니다. 아이는 건강하지만 수련은 목숨이 위급하답니다. 워낙 외진 곳에서 아이를 낳느라 재대로 준비를 못했답니다." 건장한 정유모의 눈에 눈물이 맺히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외진 곳에서 아이를 낳았기에 수련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이냐? 아! 가여운 것! 도대체 수련의 생이 어찌 그리 박복한 것이냐! 모시던 윗전이 왕비가 되었는데도 수련은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질 않느냐!" 왕비는 수련을 걱정하며 넋두리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정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호우왕 직무실로 갔다. 내관은 왕비에게 직무실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호우왕의 지시를 알려주었고 직무실에는 호족장이 있다는 것을 귀띔해 주었다. 왕비는 호우왕의 지시를 무시하고 직무실로 들어갔다. 정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만삭의 몸으로 들어오는 왕비를 보고 호우왕과 호족장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왕비!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오. 전갈을 주었다면 내가 왕비전으로 갔을 텐데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소!" 호우왕은 왕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온 이유를 왕께서 더 잘 아시고 계신 것을요! 호족장이 왔구료! 수련이 죽어간다고 보고하러 왔겠지요." 왕비는 호족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왕비님께서 무슨 오해의 말씀을 들으셨나 봅니다." 호족장은 티끌의 떨림도 없이 왕비에게 맞섰다. "오해라 했습니까? 호족장은 1년이 되도록 수련을 쫓으며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숨어서 지내겠다는 수련을 왜 그토록 찾아내어 죽이려 합니까? 명제관 아이를 가져서요? 아이를 가진 것이 수련 혼자만의 죄입니까? 아이는 명제관과 수련이 함께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명제관은 왕실 분입니다. 수련은 왕실의 피를 가진 아이를 낳은 것이지 죄인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수련을 왜! 죽이려 합니까?" 만삭의 왕비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모를 정도로 악을 써대며 호족장을 몰아 부쳤다. 호족장은 왕비의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비! 그만하시오. 그렇게 흥분하면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흥분한 왕비를 보며 호우왕이 나섰다. 날카롭게 응분된 상태로 만삭의 왕비를 내버려 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태아를 생각하는 왕께서 어찌 그리 무서운 일을 지시하셨는지요! 태아를 가진 수련을 쫒고 죽이려 하다니요! 저를 생각해서라도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왕비는 기운이 빠지는지 정유모가 갖다 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왕비님께서 잘못 알고 계십니다. 소신은 명제관님 아이를 가진 수련을 찾아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보살피려 합니다. 전정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호족장은 왕비에게 무릎을 꿇고 결백을 호소했다. "진정입니까?" 호족장의 호소에 왕비의 끌어오르는 흥분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호우왕이 나섰다. "그렇소! 왕비! 혹시 백성들에게 알려지게 될걸 걱정한 호족장이 수련을 찾고 있었소. 왕비에게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미안하오." 왕비는 자신의 손을 잡고 다정히 말하는 호우왕의 태도에 약간은 안심이 되는 듯 심기를 가다듬었다. "호우왕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수련의 뒤를 쫒는 것은 그만둬주십시오. 수련은 제가 은밀히 보살피겠습니다. 수련의 일이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수련 또한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호우왕과 호족장에게 다짐을 받은 왕비는 안정을 되찾았다. 정유모는 의원을 부른 뒤 서둘러 왕비를 데리고 나갔다. 왕비가 나가자 호족장은 한숨을 돌렸다. "드디어 왕비가 알았구료. 앞으로 호족장은 더욱 은밀히 일을 진행시켜야겠소." 호우왕도 왕비의 성화에 놀랐는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련 일은 정유모가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달 수로 봐서도 그렇고 왕비님 말씀처럼 수련이 아이를 낳은 것이 확실합니다. 수련을 찾는 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빠르고 은밀히 찾아서 풍요가야에 재앙을 안겨 주는 싹을 제거하겠습니다!" 호족장은 비장의 각오를 호우왕에게 내비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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